북위 49도선(49th Parallel, 1941) 한글 sub2s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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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49도선(49th Parallel, 1941) 한글 sub2s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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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2smi by cpointer
 

Comments

11 Retroboy
생소한 제목의 작품인데 검색해보니 '침입자들'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군요. 직접 변환하신 것 같은데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26 로카롤라
고맙습니다~~
17 실룩이
수고하셨습니다.고맙습니다^^
10 헨토
감사합니다.
S rayphie
고맙습니다.
S BJCool
감사합니다
S 컷과송
2017. 10. 19. 1차 감상

단  평 : 마지막 순간의 타협에 경배라도 보내야할까

영화적 무지 속으로 흘려보낸 감독군 중에서도 가끔 그 당시의 저열함이 폭로될까 두려워 내내 속좁은 송구함이 밀려드는
작가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로 인해 한편한편 작품을  선별해서 일독하고 모든 영화에 감상을 남기려고 노력하지만, 그럼에도
카를로스 사우라, 루이 말, 장 피에르 멜빌, 프랭크 카프라, 페데리코 펠리니와 더불어 마이클 포웰은 단순한 일견을 넘어서지
못한 죄스러움이 내내 관객으로서의 위치를 무겁게 한다. 그 당시 일회적인 접근 이후 삭제해버린 자료들을 복원할 수 없음이
안타깝고 더더욱 그들의 영화사적 위치를 여전히 조망할 수 없는 게으르고 무력한 독자로서의 빈곤이 무척이나 뼈아프다.

​본편은 2008년에 만난 감독의 8편 보다 먼저 연출된 작품이지만, 그렇다고 그의 초기작은 아니다. 그의 전쟁물 중 한편인 영화를
역추론하기 위해서는 1944년작 <캔터베리 이야기>, 1945년작 <직업군인 캔디씨 이야기>을 재독해야겠지만, 전술했듯 자료를
삭제했고 당시 기재한 단문은 완전히 무의미하다. 그러므로 본편은 마이클 포웰에 대한 두번째 만남이 아니라 새로운 면접이다.
아마도 그 키워드는 '신사도'로 집약될 수 있겠다. 무엇보다 각본가로서 감독과 오랜 기간 합주했던 에머릭 프레스버거의 논점이
2차 대전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자본주의 선후발 국가간의 식민지 점유 분쟁임을 간파함으로부터 비롯되는지는 위와 연결된다.

​비열한 폭력과 살인을 일삼고 그것을 전시한다는 외견상 본편이 전시 홍보영화로서의 역할을 완전히 폐기하지 않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의외로 독일군 병사들을 비롯한 등장 인물 거의 모두에게 낙천과 유머는 물론이고 소통과 신사도를 부여했다는 측면에서
본편은 결코 붉은 피를 보여주지 않는 고전 전쟁물의 정서를 그대로 부여받은 넉넉함이 있다. 연합군 측의 전쟁물들이 흔히 범한
적군의 유령화를 거부하고 오직 독일군의 탈출 여정에 동행한다는 점에서 당대의 전시홍보물에서도 장르적인 차별화를 꾀한다.
이는 본편이 위태로운 외줄타기로서 나치즘의 이데올로기적인 광기와 더불어 전쟁 자체에 대한 의문를 모두 겸비한다는 의미다.

​프롤로그의 나레이션으로 북위 49도선을 미지의 선이라 지칭할 때 이는 단순히 캐나다-미국 국경선을 지시함을 넘어서 과연
그 선이 일종의 자유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 표시다. 당시 미국이 아직 2차 제국주의 전쟁에 참전을 선언하기 전임을
감안하더라도 미국으로의 탈출은 본편의 홍보전략을 뒤집어 보게하는 난감함을 생산한다. 즉, 본편은 독일군의 탈출 드라마다.
영화에서 독일군을 총격하거나 체포하는 주체는 캐나다 군이 아니라 거의 일반 시민들이 담당한다. 물론, 이를 명백히 하지
않기 위해 후반부 3인 중 1인은 군경에 의해 축제 광장에서 잡히지만, 그 곳의 원주민의 시선과 시민들이야말로 사실상 주체다.

​본편은 전선 전쟁이 아니라, 적 후방에 침투한 독일군의 생존 투쟁기인데, 이 와중에 강조되는 것은 케나다 시민들의 품성이다.
​그것이야말로 본편이 강조하는 바이고 독일군은 이를 위해 거의 심정적 포로화로서 이를 반증하는 여정을 지속할 뿐이다. 즉,
본편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진술극으로서 대척점의 독일군들을 여러 방향으로 흔들어놓는다. 우선 독일군이 마을에
등장하는 시기는 사냥꾼 조니(로렌스 올리비에 역)가 돌아온 시기와 겹치는데, 이는 양자의 운명이 유사할 것임을 복선화한다.
하지만, 조니가 전쟁 자체를 모르는 미지의 구역에서 온 이라면 독일군 6명은 전쟁 자체로부터 왔다는 점에서 둘은 구분된다.

​조니와 물품 거래소의 앨버트가 독일군에게 포로가 되었을 때 그들은 결코 위축됨이 없이 나치즘의 진면목을 조롱하는데,
이에 대한 처분은 총격이다. 이 단락은 뒤집어 말하자면 상당히 매혹적이다. 기존 전쟁물이라면 넘치게 흘렀어야 할 억압의
긴장감 대신 선교사 스파이와 체스 게임, 지도 이야기 등으로 메워진 단락에서 조니의 낙천적인 면모는 적국인 캐나다를
벗어나야할 독일군들의 고립된 내면과는 완전히 정반대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이들이 조니를 죽어야하는 이유일 것이다.
자신의 위기감을 투영, 전이시킬 수 있는 존재가 이를 거부하고 당당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에 대한 부정이야말로 자기균열이다.

​​독일군이 침투하기 전 조니가 보는 원주민 사진에서 정작 그들이 탑승해야할 선박이 보이지 않을 때 앨버트는 그것은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언덕 너머에 있다고 말한다. 가시적이지 않은 선박은 독일군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불가능한 탈출 예시와도 같다.
조니는 마지막까지 유머를 잃지 않고 선교사를 독일에 보내겠다고 하는데, 이는 스파이가 아닌 진짜 선교사일 가능성이 있다.
적어도 독일군 중 보젤에게 미치는 영향으로서 묵주를 건네받음이야말로 본편이 제시하려는 소박하지만 정직한 믿음일 것이다.
전쟁이란 단지 서로의 총격으로 죽고 죽이는 잔혹한 상황 하에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는 순간들을 목격하는 바다.

독일군의 첫 여정에서 사냥꾼은 이들 중 한 명의 마음을 사냥하고 사라진다. 적어도 조니는 그들을 사냥감으로 보진 않았다.
그들 중 첫 희생자가 대륙 원주민에 의해 발생한다는 점은 물론 이전 장면에서의 원주민 여성의 죽음과 연동되겠지만, 그럼에도
독일군이 파괴한 것이 고요한 평화임을 적시한다는 점에서 고루한 이분법을 도출한다. 즉, 독일군의 야만성과 캐나다의 순박함의
양갈래길이 극 내내 지속될 것을 진술한다. 두번째 죽음은 그들 중 기술병인 쿠네카의 죽음은 추락사인데, 그는 대위와 대립하는
인물이면서 전술적인 면모를 지닌 이라는 점에서 그의 사망은 남겨진 이들의 운명을 가늠하게한다. 흥미로운 건 추락 상황이다.

비행기가 침수되는 상황에서 3인을 구하는 건 조니에게 묵주를 건넨 보젤인데, 그는 두번째 장소인 기독교 공동체 마을에 갈 때
제일 먼저 소녀에게 말을 건네고 유대관계를 가지며 소녀를 보호하려하며 자신의 원 직업인 제빵사의 기술을 되살리는 인물이다.
홍보물로서 독일군 장교의 나치즘 연설과 대립되는 공동체 수장의 웅변 장면은 대위가 서 있는 자세인데 반해 수장은 앉아있다는
점에서 이미 승패가 가려진다. 왜냐하면, 주민들 역시 앉아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모두가 안정되어 있고 그로 인해 자유다.
첫번째 원주민 저격에 이어 두번째 추락사를 지나 세번째가 자신들을 구출해준 보젤에 대한 처형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무엇보다 아직 캐나다 정규군이 개입하지 않았고, 그들은 점점 내부의 반목으로 붕괴된다. 더 이상 죽음은 나열되지 않는데,
네번째 병사부터 그들은 그저 체포될 뿐이다. 전술했든 네번째 군인은 원주민 추장의 시선 숏의 편집 이후에 폭주하다 체포된다.
이 장소가 성대한 축제의 장에서 성립된다는 점에서 이들의 야만은 다시 평화에 의해 패퇴한다. 네번째 장소인 산악지대에서
남은 두 명은 다시 반목하는데, 이 단락에서 등장하는 영국인 스콧은 예술과 자연을 사랑하는 교양인으로 등장하는데, 사실상
초반부의 조니와 동일한 인물이다. 스콧(레슬리 하워드 역)은 독일 장교로부터 비겁함을 지적받자 당당히 이를 뒤집어버린다.

스콧이 총격 앞에 당당히 비무장으로 걸어갈 때 그는 본편의 이분법을 육체로 반증한다. 인민의 평화 대 야만의 전쟁이라는
매혹은 미국이 2차 제국주의 전쟁에 참전한 이후 개봉되어 흥행하고 호평받는 데 고전적인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감독은
전장 그 자체보다 평화로서 이미 그 기운을 누를 수 있음을 반복 진술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조니와 스콧 그리고 공동체 수장의
3인은 이를 증명한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히르트 대위의 처분은 이전과 색다르다. 그는 열차 안에서 낯선 이와 동행하게 되는데
그는 군인이면서 동시에 군인이 아닌 기이한 신분이다. 그는 굳이 탈영이 아니라 외출이라 표현하고 나중에 군인이라고 밝힌다.

엔딩에서 히르트 대위가 왜 갑자기 권총을 승무원에게 건네는지는 서사적으로는 불합리하다. 물론, 열차 밖의 상황도 감안하고
합법적으로 미국 내 독일 대사관으로 갈 수 있다고 추정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그의 면모와는 배치되거니와 그가
너무 빨리 승리감에 도취된 것은 아닌지 의아하다. 요점은 승무원들이 그를 사람이 아닌 잘못 운송된 화물로 보고 반송한다는
행위에 있는데, 마지막 순간 캐나다 군인과의 대결 장면을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진짜 화물이기 때문이다.
엔딩은 후진하는 기차가 다리 위, 아마도 북위 49도선을 지나가는 장면이다. 이는 전쟁에서 누가 승리하는가를 뒤엎는 예시다.

단 한번의 전투 장면도 없는 전쟁 홍보물임에도 본편이 낡은 이분법적 신뢰로 관객을 안내할 때 과연 이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이후 감독의 세계를 조망할 때 본편이 의도된 허위 문법인지 진정성으로의 초대인지는 그다지 쉽게 결정되지 않는다.

<북위 49도선>은 전쟁 홍보물의 예산으로 전장을 버린 이후 그 전쟁 자체를 무화시키고 오직 공동체의 여유를 승리시키며
군인이 아닌 군인과 원주민의 시선을 통해 나치즘을 화물화시켜버린 이후 폭력 없는 평화를 승인하는 기이한 반전물이다.
S 컷과송
2022. 9. 22.  재감상


단  평 : 다른 세계로서의 단절



본편의 전작들보다 후작들에게서 이계 異界를 연상하게 됨은 당연함에도 본편이 굳이

잠수함-비행기-카누-기차-자동차 등의 거의 모든 운송 수단을 동원할 때 어떤 간절한

탈주의지를 감촉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선전전이라는 외피는 결국 상대의

이데올로기가 결코 본질적일 수 없음을 반증하는 방식으로서 또다른 왜곡된 이상향을

대리함으로서 가능하다는 맥락에서 본편은 이분법의 폐쇄 구역 밖으로 외출할 수 없다.



한편으로는 당연할 수 있겠지만, 철저히 불균형적이며 비대칭적으로 전략화된 위치는

나치보다는 캐나다에 할리우드 유명 배우들을 배치함으로서 이미 로드 무비의 용기를

기실 상실시킨다. 게다가, 실제로 탈주자들을 응징하는 역할에서조차 지역 원주민의

존재를 부각시킬 때 유력한 독재적 남근의 영광은 신뢰될 수 없다. 불편한 내부로의

침입은 자신의 외부자적 안전성의 허위를 붕괴시키고 길 위의 점멸만을 예비한다.



하지만, 전술한 바 유명 배우들의 출연에도 불구하고 본편의 선전물로서의 위치는

에머릭 프레스버거의 각본보다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 칸트적인 서구 윤리관은

스스로 블랙홀과도 같이 자신을 또다른 본질로서 결정함으로서 그 내부에 어떠한

빈틈과 구멍도 실재할 수 없다라는 환타지를 기반으로 함으로서 '다른 세계'라는

상호를 왜곡시킨다. 결국 문제는 이를 어디까지 향유할 수 있는가에 대한 자학이다.

이 지점에서 본편은 후진을 택함으로서 스스로 퇴행임을 자백했다고 해야겠다.